▲ 29일 철원의 한 시골길 위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하고 있는 이시우 사진가를 만났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한 사나이가 걷고 있다. 제멋대로 자란 머리칼과 수염엔 벌써 흰 빛깔이 언뜻언뜻 섞여있다. 가슴에 단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이라는 글귀를 보기 전에 멀리서 보기엔 딱 무전취식하는 ‘거리의 사람’ 모양새다.

사진가 이시우(40). 지난해 4월 19일 국가보안법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돼 48일간의 목숨을 건 감옥안 단식 끝에 보석으로 출소해 1심 선고공판을 코앞에 둔 그가 3달째 다시 길 위에 서있다.

검찰은 지난 10일 그에게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압수물품 몰수라는 중형을 구형했지만 그는 지난해 11월 7일부터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국회앞 삼보일배에 뛰어든 이래 12월 3일 혼자서 다시 삼보일배로 임진각으로 향했고, 지난 21일 마침내 임진각에 도달했지만 그는 아직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새벽 5시부터 저녁 7,8시까지 임진각에서 고성까지 휴전선을 따라, 이미 2004년에 ‘유엔사 해체 걷기 명상’을 펼쳤던 그 길 위에 그가 다시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28일 낮,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에서 토기교, 텃골교, 광명교, 율곡교, 논골교, 논골1교, 대복교, 낯익은 듯한 이름의 작은 다리들을 건너 자등리로 향하고 있는 그를 만나 ‘명상’의 ‘화두’가 풀려나가고 있는지 물었다.

농담처럼 남들이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간첩과 거지와 도인이라고 부른다”며 “아마도 맞는 것 같다”고 웃어넘기는 그는 항상 온유해 보이지만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내적 강인함이 있다.

찬바람을 가르며 새벽처럼 길을 나서는 그의 이야기를 궁예와 임꺽정의 꿈과 한이 서려있다는 고석정 인근 한 식당에서 들어보았다. 

오는 31일로 1심 선고공판이 다가와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길위에서 명상을 이어가고 있는 그에게 법원은 과연 어떤 선고를 내릴 것인지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논이나 밭도 다 길이 된다”

▲ 고석정이 내려다 보이는 한 식당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통일뉴스 :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3보 1배(三步 一拜, 이하 삼보일배)를 하다가, 국회 앞에서 임진각까지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 삼보일배를 진행하고, 지금은 고성까지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는지 간략히 소개해달라.

■ 이시우 : 여의도에서 했던 삼보일배는 시위의 한 수단으로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소속 대학생들과) 같이 시작했던 것인데, 어느 순간 그것이 시위 형식으로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명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 내 스스로에 대한 자기검열 같은 것이 있다라는 것을 보면서 의외로 단순히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 말자라고 하는 것보다 더 뿌리 깊은 뭔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국가보안법을 심도 깊게 생각해보자라고 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다.

□ 시작해서 얼마나 됐나?

■ 처음 여의도부터 치면 70여일이 되지만 명상을 시작한 것은 한달이 좀 넘은 것 같다.
임진각까지는 인도가 있어서 삼보일배가 가능했는데, 파주 들어서면서부터는 거의 인도가 없기 때문에 그게 좀 어려웠다. 그냥 걷는 것으로 하고 있다.

□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이라는 명칭이 독특하다.

■ 처음에 삼보일배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같아서 여기서 그만 둬야 되나 싶었었는데, 삼보일배냐 걷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상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화두도 해결하고 좀더 큰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얻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게 얻어지면 꼭 굳이 어디까지 가고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 걸으면서 뭘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먼저 하루 일정부터 소개해달라.

■ 한 5시 정도에 보통 출발해서 찜질방을 나와서 어두운 상태에서 걷기 시작한다.

이전에 삼보일배를 할 때는 그렇게 아침 일찍 시작할 수가 없었는데, 이 손바닥이 얼어서 절을 할 수 없다. 아무리 두꺼운 장갑을 껴도 바닥에서 찬기가 올라오니까 몸이 막 상하더라. 밤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모르고서 막 걸려 넘어지고 이런 경우가 있어서 사람들 출퇴근 시간을 피해서 그 사이에만 했었다.

걷기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쭉 걷게 되고 해지고 나서 7시나 8시 정도까지 보통 걷는 것 같다. 마을이나 동네 같은 것이 나타나서 찜질방이나 숙소가 될만한 곳이 나타날 때까지는 가야하니까 그전에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게 나타날 때까지는 늦더라도 계속 걷는다.

그 이전 같으면 길로만 따라 걸었었는데 가급적 길을 따라 걷지 않으려고 하니까 논이나 밭이나 이런 데도 다 길이 되고, 오히려 겨울 걷기가 그런 거는 더 편한 것 같다. 그래서 굉장히 나 스스로는 충만한 즐거움에 빠져있다.

길 위에서 만난 3명의 보살

▲ 길 위에서 그는 '간첩과 거지와 도인'으로 취급당했는가 하면 3명의 보살을 만나기도 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혹시 길을 가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지는 않았나?

■ 많았다. 처음에 삼보일배 할 때 눈발이 날리는 굉장히 추울 때였는데 서대문 쪽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더니 “아니, 누구신데 이렇게 열심히 정진을 하시냐”고 그래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하여튼 하시는 게 꼭 이루어질 겁니다”라고 하고서는 노스님인데 사라지시더라. 첫 번째 나한테 나타난 보살이었다.

두 번째 보살은 그 다음날 독립문 정도를 삼보일배를 하고 있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등뒤에서 귓가에 들으라고 소리를 하고 가는데 “이런 정신 나간 놈이구만”하고 지나가는 거다. 이렇게 삼보일배 하는 것도 그렇고 국가보안법 자체를 없애라는 행동을 읽고서 아마 그렇게 말씀한 것 같다. 내가 볼 때는 그 사람이 두 번째 보살이었다. 하여튼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극단이었다.

세 번째 보살은 아이였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막 쏟아져나오더니 한 아이가 꼬치를 입에 물고 저를 지키고 섰다가 “아저씨 뭐하는 거예요”하고 물어봤다. 그래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법인가요? 쓰레기 버리지 말란 그런 법인가요”. 제가 삼보일배로 바닥을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 북한 알지?” 그러고 설명하려고 하니까, “예, 북한 잘 알아요. 북한은 우리 적이예요” 딱 그러는 거다.

그 다음부터 “북한 알지?”하고 설명하려고 했던 말이 쑥 들어가고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지 긴장이 확 되는 거다. 그래서 상당히 조심해서 말을 꺼낸 것이, “동무라는 말이 있잖아, 친구를 동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동무라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동무라는 말을 하게 되면 북한 사람들을 찬양했다고 잡아갈 수 있는 법이 국가보안법이야” 이러니까, “아, 그래요?”.

그래 제 마음 속에서는 “말도 안돼요”라고 답변을 하길 바랬던 것 같다. 근데 충격을 받았던 게, 친구들과 지나가다가 애가 따로 떨어져서 선 상태에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 그래요? 그럼 그런 말 쓰지 말아야겠네” 그러면서 쓱 사라져서 걸어가는데, 아주 막막했다. 역시 내가 참 천진난만한 낙관을 갖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 아이한테 과연 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지금도 그 답이 해결되지 않았다. 지나가는 순간에 아이를 붙잡고 왜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되는지,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뭘까. 이건 아직 답을 못 찾았다.

□ 걷다보면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몸도 아플 때도 있을텐데, 특별한 비법 같은 것이 있나?

■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여튼 여지껏 걷는 걸 많이 하다 보니까 요령이 많이 생겨서, 아프면 아프지 않게 걷는 방법도 좀 알고, 그때 그때 잘 넘기는 것 같다. 신발 벗고 좀 주무르기도 하고.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건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발에 문제가 생기는 거다. 아는 만큼 실천만 하면 된다.

□ 아무래도 오랫동안 걷다보면 먹는 문제, 자는 문제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 먹는 것은 아침에 김밥 같은 것 먹고, 출발해서 점심은 거의 안 먹고 저녁 때 몸이 많이 힘들고 지치면 음식 같은 것이 받아서 저녁때는 좀 많이 먹게 되는 것 같다.

□ 찜질방 같은 곳에서는 잠을 편하게 잘 잘 수 있나?

■ 항상 이렇게 하고 나면 몸이 워낙 피곤해서 도착했을 때는 간단히 씻자마자 거의 곯아 떨어져 자는 편이다. 오히려 일찍 일어나서, 2시나 3시쯤에 일어나서 PC방 같은 데서 간단히 처리할 것을 처리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생활리듬이 그렇다.

“가장 큰 깨달음이라면 역시 간절함이다”

▲ 그가 명상중인 29일에도, 철원에서는 군사훈련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지금까지는 고성까지를 1차 목표로 걷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걷는 과정에서 문제의식이나 화두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 사실은 파주 들어서면서부터 첫 번째 좋은 생각이 떠올랐고, 두 번째로 며칠 전에 그 생각이 좀더 발전된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굳이 계속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생각의 순서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고성까지는 계속 가보기로 생각하고 있다.

□ 어느 정도 한 두 가지 실마리를 얻었다고 했는데, 소개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나?

■ 나중에 정리가 되면 공식적인 활동 등으로 표현될 것 같고, 어쨌거나 가장 큰 것은 삼보일배를 하다보니까 계속 엄숙해지고, 무거워지기만 했었는데 어느 순간에 굉장히 즐겁고, 재밌었다. 역시 대중운동은 즐겁고 재밌어야 된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는데, 그런게 쉽지 않다가 첫 번째 좋은 생각은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아, 이런 정도면 재밌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고 즐거운 운동방식이다.

두 번째 떠오른 생각은 그것은 좀더 치밀하게 내가 사진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라서, 내 사진의 영역으로 국가보안법 문제를 들여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 앞으로 기대해 보겠다. 최후진술을 보면 내용이 많았는데, 눈에 띄었던 것이 삼보일배로 한강 다리를 찬바람을 맞으며 건너면서 간절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결을 느꼈다고 했는데, 사실 겨울에 삼보일배나 걷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 결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 그전까지 나의 미학관이랄까 이런 것이 주로 아픔, 어두움을 끌어안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결이 미학의 개념이었었는데, ‘아픔이란 것도 어쩌면 이미 소통되고 있는 것이다. 아픔이 있는 순간 벌써 이미 치유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아픔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그 무엇이 우리한테는 있고, 소통될 때 비로소 아픔으로 인식되는데, 소통되지 조차도 못하고 버려지고 소외되는 것들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과연 아픔으로까지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이번에 삼보일배를 하면서 얻었던 가장 큰 깨달음이라면 역시 간절함이다.

간절하다고 하는 것은 답도 없고 길도 없는 길이다. 소외된 것과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은 답도 없고 길도 없는 것인데,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소통시킬 수가 있고 결국 소통시켜 내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이 갖고 있는 간절함 만이 소외돼 있고 버려진 것들에 대해서 소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가 답이 없다고 해서 보통 포기할 때가 많고, 때가 오기를 기다릴 때가 참 많은데, 답이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또 계획이나 목표가 불투명하다 할지라도 정말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한걸음 한걸음씩 내딛다 보면 분명히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결이 만들어지고 생긴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 다음에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절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가장 큰 얻음이었던 것 같다.

□ 어떻게 보면 간절함이라는 화두가 최근 들어 국가보안법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그라든 때에 이 작가가 홀로 외롭게 명상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이번에 삼보일보나 걷기명상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나 호응은 어떠했나?

■ 처음 시작할 때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반대하셨고, 저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반대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잘못된 방식이라고 해서 비판하고, 심지어는 비난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슨 운동의 흐름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었고, 정말 명상을 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라고 하는 것이 취지였는데, 의외로 그런 뜻들이 오해돼서 전달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역시 삼보일배를 하기를 잘했구나. 나 역시 보이지 않았던 또 볼 수 없었던 것들과 만나게 되고 그런 걸 통해서 내가 나아가게 될 길에 대해서 나 스스로 많이 알게 된 것이 큰 성과였던 것 같다.

구속보다 중요한 것은 ‘관성으로부터의 자유’

▲ 포장도로보다는 땅을 즐겨 밟는다는 이시우 작가.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오는 31일 1심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는데 이후 일정에 대해 소개한다면?

■ 선고가 한주 늦춰져서 31일 최종 선고가 날 예정이다. 삼보일배나 걷기명상은 재판과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고, 재판은 재판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써 제가 최선을 다해서 중간 중간 준비를 해왔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나름대로 했던 것 같다. 그것에 대한 결과가 선고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삼보일배를 시작했던 것은 재판과는 전혀 관계없이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의식 속에서 엄청난 관성으로 뿌리박혀 있구나, 이런 관성, 이런 상태에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국가보안법, 테러방지법이라든지 이런 것이 새로 나왔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받아들을 수 있는 준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돼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국가권력이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만들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들 스스로도 국가보안법 피해를 만들고 있고, 사실 언제 내가 당할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그런 상태를 방치하고 있구나. 나만 숨으면 된다라고 하는 생각이 의외로 깊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 명상은) 시간은 예측할 수 없지만 일단 고성까지 가보려고 한다.

□ 최근 검찰이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압수물품 몰수를 구형했는데, 구형받고 나서의 느낌이나 입장은?

■ 처음에 검사가 구형 있기 전에 나의 보석에 대한 항고, 재항고를 두 번씩이나 하면서 사형내지 무기징역까지 언급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의외로 (구형을) 조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굉장히 많이 풀이 꺾였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어쨌거나 검사가 처음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이지 않겠느냐 기대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재판과정을 쭉 놓고 보니까 사실 내 사건보다 일심회 사건이나 김성수 박사 같은 분을 간첩이나 노동당 당원으로 몰아서 해보려고 하는 것을 선전하려는 목적이 더 크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건 자체의 진위보다 그런 것을 계속 확대하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간첩죄 같은 것은 전혀 기소가 안 돼 있지만 ‘실제로 간첩이다’라고 하는 뉘앙스로 보수단체 있는 분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왔던 것 같고, 실제로 재향군인회 같은 데서 ‘간첩 이시우’라는 표현을 쓰고 법정 최고형에 처해달라는 탄원서를 쓸 정도까지 하는 걸 보면 재판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국가보안법을 다루는 검사들은 구속시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다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10년 구형이라면 중형이고, 선고가 내려져야 알겠지만 심지어는 선고공판장에서 법정구속까지도 가능한 상황인데, 1심 선고를 앞둔 심경을 말한다면?

■ 이제는 구속되거나 이런 것이 마음 속에서 두렵거나 걱정되는 것은 아니고 구속보다는 내 안의 검열로부터의 자유, 내 스스로 나도 모르게 만들어 놓았던 관성으로부터의 자유, 이런 것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사회일반으로 보더라도 이렇게 형성돼 있는 관성의 체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크다고 생각된다. 구속되고 안 되고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 특히 검찰은 압수한 이 작가의 사진작품 전체를 몰수한다고 구형했는데, 어떻게 보나?

■ 다른 것은 몰라도 작품을 몰수하겠다는 발상은 파시스트적인 발상이다. 검사가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고 하든지, 알면서 그러고 있다면 상당히 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나는 (검사가) 모르고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싶다.

작품에 대한 이같은 태도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때 그림 같은 것을 전부 불태우게 했던 근본적인 분위기라든지, 히틀러가 선전선동화를 그리게 하면서 만들었던 파시스트 미술이라든지 그런 역사적 사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발상이고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사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작품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미 작품의 훼손된 부분에 대해서는 민사소송을 걸어놓은 상태이다.

□ 최근 분위기나 판결을 보면 ‘이적표현물 소지죄’ 만으로도 유죄판결을 받은 선례들이 있는데, 이 작가의 경우 어떻게 적용될 것으로 보나?

■ 이미 이적표현물 같은 경우는 사회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어진 법이다. 국정원 같은 데서도 신분검열 같은 것이 따로 없이 북한 원전을 다 대출해주고 있고, 북한자료센터 같은 경우도 기관장의 추천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역시 거의 제한 없이 학문연구의 자유를 위해 대출.복사를 다 허용하고 있는 상태이고, 복사 같은 것은 도서관 같은 데서 다 되고 있기 때문에 이 법이 토대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붕괴됐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것은 이전부터 다 확인이 됐고, 나 역시 직접 확인해 봤지만 계획하는 바가 있어서 나중에 한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오는 31일 1심 선고 이후에 만일 법정 구속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 일단 쭉 해왔던 평화운동이나 유엔사 문제 등등 많이 있는데, 다행히 그런 부분 일들을 단체들에서 많이 이해해주시고 받아주셔서 많이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에 제가 조금 마음의 짐을 덜었고, 지금 나로서는 국가보안법 문제를 계속 고민하고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 감옥에서 단식하면서부터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기르고 있는데 앞으로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때까지 계속 기를 생각인가?

■ 내 정신상태가 내 정신이 아니고, 내 마음의 상태가 가지런히 정리된 마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까 계속 수염 기르는 거나 머리 기르는 것 등등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냥 이 상태까지 왔는데, 이런 거 저런 거에 신경을 쓸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계기나 매듭이 필요하기는 할 것 같다.

주도적 의제 설정 능력이 관건

▲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풀어두었던 표찰을 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최근 이명박 차기 정부가 정권 인수과정에 있는데, 1심 재판 끝나고 2심 재판에 들어가면 아마 이명박 정부 하에서 2심을 받게 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입장이나 우려는 없나?

■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든다. 이명박이라는 개인을 놓고 보면 상당히 실용적이고 지나치게 수구적이지는 않다고 그러지만, 미국과의 관계나 북한과의 관계를 종합해서 보면 개인의 성향만 가지고 시국을 끌어가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된다.

일례로 1970년대에 미국과 당시 중공이 화해무드에 들어가면서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한편으로 ‘남북을 분단상태로, 평화상태로 유지하자’고 해서 남북대화를 촉구해 남북대화가 이뤄지게 된다. 남북대화가 이뤄지고 7.4남북공동성명까지 만들어지게 됐는데 박정희 정권은 곧장 유신을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공안정국을 만들어갔던 사례를 보면,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이것을 남한 정부가 반대하는 분위기로 갔을 때 역사적으로 예외 없이 남쪽에서는 반동적인 분위기가 항상 있어왔고, 그런 측면에서 이명박 대통령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우리가 이명박이라는 개인을 봐왔던 것과는 달리 아마 그런 역학구도에 의해서 상당히 지금보다 어려운 국면이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 이 작가는 특히 유엔사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는데, 10.4선언에 한반도 평화체제가 상당히 폭넓게 담겨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하는지?

■ 지금 북미관계가 더 규정력을 가지고 있고, 남북관계나 한미문제가 그것을 따라가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역시 이 문제도 김영삼 정부 때 북미관계가 좋아지고 있을 때 남측 정부가 틀었던, 장애를 만들었던 조건과 상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당선자가 국방부와 한미연합사를 방문하고 같은 날 세 번째로 재향군인회를 방문했었는데, 이 당선자는 이들이 자신의 지지세력임을 다시한번 과시하고, 재향군인회도 그런 분위기에 고무돼 있는 이런 상황인 걸 볼 때 구조 자체가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재향군인회가 이명박 당선자가 방문하는 날 나에 대해 엄벌에 처해달라는 탄원서를 그날 (법원에) 냈다.

□ 북미관계가 변화하면서 유엔사의 위치가 상당히 불안해지고 심지어는 평화체제가 들어서면 없어질 수도 있는 분위기까지 갔다고 판단했는데, 국내 정권교체에 따라서 그것도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인가?

■ 그렇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완전히 종속된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왔고 정부가 북미간의 정책이나 관계진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얼마든지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갈 수 없다할지라도 장애물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도 쉽지 않지만 계속 틈을 보는 것 같고, 유엔사 문제나 평화협정 문제 등도 남쪽 정부로서는 그런 것을 다시 되돌리기가 쉽지 않겠지만 역시 끊임없이 계속 시도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면서 여러 장애가 조성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도 물건너 갔다고 봐야 하나?

■ 지금 2004년도에 한나라당에서 주장하던 수준을 이야기하기도 힘든 정도로 된 것 같고 이미 민족민주운동진영 내에서도 현실적으로 그런 걸 거의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나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역시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 속으로 상대방이 끌려 들어오게 할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게 주도적으로 의제를 설정할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국면 전환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달려있다고 본다.

이명박 집권,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릴 오히려 좋은 기회”

▲ 그의 길 위에서의 명상이 언제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사람들이 오랫동안 감옥에서 단식하고 나와서 다시 추운 겨울에 삼보일배와 걷기 명상을 하고 있어서 건강이 괜찮은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 단식은 많이 회복된 것 같고 건강도 오히려 더 작심하고 추위 속에 나오니까 면역이 돼서 잘 견디고 있는 것 같다.

□ 가족들이 감옥에 있을 때 아무래도 고생도 많이 하고 그랬을텐데, 다시 길을 나서서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가족들의 생각은 어떤지?

■ 처음 삼보일배를 하려고 여의도에 나오기 전날 가족회의를 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집을 오랫동안 비워야겠다고 이야기하니까 처도 말리는 걸 포기했고 아들도 자기는 괜찮으니까 건강하게 잘 갔다오라고 했다. 그런데 역시 시간이 길어지니까 언제 오냐고 자꾸 재촉하고 그런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가족들이 이 작가가 감옥에 가고 삼보일배 길을 나서고 이런 새로운 상황을 접했는데, 지금 상황은 좀 어떤가?

■ 나 때문에 가족이 거의 쑥대밭이 되다시피했고 위기상황까지 갔었는데, 다행히 도와주신 분들이 많아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고, 지금은 오히려 그런 큰일을 당하고 나서 일종의 면역이 좀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이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인데, 가족이 그나마 이 정도라도 받아들여주고 포용할 수 있는 상태는 된 것 같다.

□ 이 작가가 구속됐을 때 석방대책위도 만들어지고, 이후 공판과정에 많은 분들이 방청해주신 것으로 안다. 그런 것을 접하면서 생각이나 느낌, 그런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될 때 사실 간절하게 주위에 있는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그런 몇몇 분들로부터 도움을 못 받아서 참 힘든 상황일 때가 있었다.

그 이후 오히려 전혀 모르신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애를 써주고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서 사람관계가 더 새로워지고 새로운 측면을 발견할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서 참 갖기 힘든 기회를 갖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께 너무 감사드리고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줄 수 있었던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 향후 집필계획이나 출판계획에 대해 소개해달라.

■ ‘한강하구’ 책이 가장 빨리 나올 것 같고, 유엔사 문제나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서 계속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 보니까 오히려 해야 될 일들에 대해서 더 간절해지고 왕성한 욕구가 생기는 것 같다. 일이 정리가 되는대로 더 열심히 글쓰기나 사진작업 같은 것을 하게 될 것 같다.

□ 이 작가는 통일뉴스 전문기자라는 이유 때문에, 특히 통일뉴스에 기고한 글 때문에 검찰로부터 많은 항목에 걸쳐 기소당했는데, 통일뉴스 전문기자로서 그런 과정들을 되돌아보면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나는 검찰에게 이야기 했듯이 학자도 아니고 어찌보면 무시할만한 그런 존재에 불과했는데 통일뉴스가 처음에 나 같은 사람의 글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또 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돼서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통일뉴스가 아니었으면 이런 정도의 성과를 만들기도 힘들었을 거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한 것이 그동안의 활동한 것에 대한 일종의 평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후회나 이런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할 걸 이런 생각이 있다.

□ 특히 지난 연말에 한국인터넷협회 창립 5주년 기념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았는데.

■ 과분한 상이었다. 어쨌거나 법정에서는 검사가 이시우는 기자가 아니고 위장기자라고 계속 주장을 해왔었는데 인터넷기자협회에서 특별상을 줌으로 해서 그런 오해를 불식시켜줬다는 생각이 든다.

□ 마지막으로 지금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은?

■ 나는 대선 전부터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이미 다 패배했구나. 설령 대선에서 이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패배했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가졌다. 그런 것을 많이 목격했고.

우리의 마음의 기세가 그러한데 설령 약간의 성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릴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들이 상당히 많이 여기저기서 생기고 그것을 견디는 사람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또 한번 구분될텐데, 초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향후 몇 년 동안을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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